이귀전 / 베이징 특파원

양국 정상, 성과 강조했지만 공허감
美·中 사이 끼인 韓 경제 불안 증폭
‘칩4’·사드 등 싸고 中 연일 견제구
향후 관계 기대보다 우려감 더 커

“양국은 1992년 수교 이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습니다.”(윤석열 대통령)

“양측은 협력과 윈윈을 견지하고 호혜협력과 상호 교류를 심화해 공동 번영을 이뤘습니다.”(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서울과 베이징에서 지난 24일 각각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리셉션’에서 한국과 중국 정상은 공통적으로 30년의 성과로 양국의 발전을 꼽았다.

양국 정상뿐 아니라 각 단체에서 개최한 다양한 기념행사에서도 지난 30년간 경제 성과를 강조하는 미사여구가 쏟아졌다.

“중국은 한국 전체 교역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이 됐습니다”(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양방향 투자가 누적 1000억달러를 넘었습니다.” (런훙빈·任鴻斌 중국국제무역촉진위원회 회장)

양국은 수교 이후 경제 분야에 있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는 사이”(리커창·李克强 총리)란 말이 가장 어울릴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 관계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상황에서 수치만 앞세운 성과 자랑은 오히려 양국 관계의 공허함을 키운다.

경제 부문부터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국내에서는 우리 수출액의 25% 안팎을 차지하는 중국 의존도가 한국 외교안보 정책의 운신 폭을 제약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세계 최대 소비시장이라는 중국 역시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봉쇄 조치와 60년 만의 가뭄 등의 영향으로 큰 폭의 성장률 둔화가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하면서 지정학적 위기로 경제 불안은 증폭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 등 첨단 기술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등이 한·중 간 갈등의 뇌관이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협력체 ‘칩4’의 한국 참여를 놓고 중국은 견제구를 날리고 있다. 외교부나 관영 매체들은 “한국은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중·한 관계 발전에 유리한 일을 많이 하기를 바란다”며 경제를 볼모로 잡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한국의 국익을 단순히 숫자로만 얘기할 수는 없다는 점을 중국은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선택한 사드 배치에 대해 중국은 자국 위협론을 제기하며 한한령(한류제한령)을 꺼내 들었다. 최근엔 ‘한국이 3불(不·사드를 추가하지 않고, 미국 미사일방어·한미일 군사동맹 불참) 1한(限·사드 운용 제한)을 선시(宣示·널리 알린다)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서면 약속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30년 전 한·중 수교 공동성명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있다. 중국이 한반도 평화와 북핵 문제에 한 역할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칩4와 사드 등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중국이 한국을 보는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국의 사드 배치, 칩4 참여가 국익을 위한 자주적인 선택이 아닌 미국에 속박당해 있기 때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시 주석은 30주년 축하 서신에 “대세를 파악하고(把握大勢) 방해를 배제(排除干擾)해야 한다”는 표현까지 썼다.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지난 9일 열린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한국 측에 △독립자주 △선린우호 △개방공영 △평등존중 △다자주의 등 5가지를 향후 양국 관계에서 ‘응당(應當·마땅히) 견지해야 할’ 사항들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이 한·중 관계를 수직적이고 시혜적인 관계로 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무례한 발언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한·중 수교 30주년이지만 향후 관계에 대한 기대보다 우려가 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어도 마음이 가지 않는 상대를 ‘펑유(朋友·친구)’라 할 순 없다. 중국에서 20년 넘게 사업을 해온 기업가의 “오늘이 한국과 중국 관계가 가장 좋은 날”이란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