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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피해지 찾은 日학생들 “한국인들 왜 이리 많이 죽었나요?”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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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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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 도쿄 특파원

   
▲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의 폭심지 인근에 조성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공원 뒤에 원폭을 맞아 앙상하게 잔해가 남은 ‘원폭 돔’이 보인다. 히로시마=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77년 전 참상을 반복해선 안 됩니다. 유일한 원자폭탄 피폭국인 일본의 책무이자 총리로서의 맹세입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9일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열린 평화기념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또 다른 원폭 피폭지 히로시마를 지역구로 둔 기시다 총리는 일본 총리 최초로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의에 참석하는 등 ‘피폭 외교’에 공을 들이고 있다.》

   
▲ 이상훈 도쿄 특파원

하지만 일본이 ‘핵 없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로서의 책임에는 침묵하며 군사 무장을 강화하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일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후 연일 대만해협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중국, 북한 위협 등을 이유로 군비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최근 미국이 주최한 연합훈련에서 사상 처음으로 존립 위기 사태를 가장한 훈련에 나서며 사실상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드러냈다. 원폭 투하 77주년을 맞은 피폭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현장을 둘러봤다.

히로시마 희생자 10%가 한인

   
▲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설치된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초등학생들이 당시 한국인 희생에 대한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히로시마=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지난달 15일 히로시마 중심지에 있는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공원 내에는 원폭 투하를 상징하는 ‘원폭 돔’이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에는 일본에서만 연 170만여 명이 찾은 명소다.

원폭으로 앙상해진 철골과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가 그대로 보존된 이곳은 히로시마가 피폭지임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인근에 세워진 전시관에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의 사진,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끔찍한 참상의 그림 등이 있다.

공원 한쪽에는 원폭 피해를 입은 한국인의 넋을 달래기 위한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당시 히로시마 희생자의 10%가량이 강제동원 노동자, 군속 등으로 히로시마에 살던 한국인이다. 마침 이날 초등학생 10여 명이 지도교사와 함께 이곳을 둘러보며 현장 학습을 했다. “한국인이 왜 여기 살았어요?” “한국인이 왜 이렇게 많이 죽었어요?”라는 학생들의 질문에 교사는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원폭에 큰 피해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1945년 한 해 히로시마에서만 14만여 명이 원폭과 그 후유증으로 숨졌다. 현재 생존한 피폭자 11만8000여 명의 평균 연령은 84.5세. 당시 참상을 잊지 않기 위해 히로시마 전시관에서는 원폭 참상을 겪은 32명의 자원봉사 증언자들이 관람객에게 당시의 상황을 육성으로 전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원폭을 체험했다는 가지모토 요시코 씨(91)는 “지구가 폭발하는 것 같은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2층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그 밑에 깔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밖에 나와 보니 거리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팔이 잘린 사람, 다리가 너덜거리는 사람들이 유령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다 쓰러져 죽었다”고 당시 참상을 전했다.

히로시마 피폭 사흘 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기자가 찾은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입구에는 ‘나가사키가 마지막 피폭지가 되길 바라며’란 문구가 한국어, 일본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로 새겨져 있었다.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성당의 잔해 모형, 찢어진 군복이 곳곳에 전시됐다.

자료관에서 만난 나가사키 피폭자 미세 세이치로 씨(87)는 “폭발 후 검은 비가 왔다. 방사성 물질이 섞인 비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검은 비를 맞고 평생 방사능 공포에 시달렸다. 피폭자는 암에 걸려 죽고 아이를 낳으면 장애인이라고 해 언제나 걱정이었다. 결혼해 자식이 태어났을 때, 그 자식이 손자를 낳았을 때 언제나 손가락과 발가락이 10개씩 온전히 있는지부터 확인했다”고 토로했다.

당시 나가사키 주민 24만여 명 중 원폭으로 7만4000여 명이 숨졌다. 특히 이 중 1만여 명이 조선인이었다. 상당수가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 사업장에 강제로 끌려온 이들이다. 자료관에는 재일교포 이기상 씨가 쓴 책 ‘피폭조선·한국인의 증언’의 일부를 소개하는 코너도 있었다.

‘번쩍하고 굉장한 번개가 친 뒤 기절했다. 깨어 보니 초등학교에 실려와 있었다. 옆 교실에서 한국말로 “아이고 아이고” “살려주세요”라고 동포들이 울며 호소했다. 조선에서 징발, 연행된 젊은이들이 무기 공장에서 팬티 한 장만 입고 막노동을 하다가 피폭된 것이다. 분노와 안타까움이 끓어올랐다.’

日, 가해자 책임 침묵

원폭 피해를 호소하는 일본을 두고 국제사회는 ‘전쟁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피폭 피해를 극적으로 강조하면서 가해의 책임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것은 일본의 오랜 습관이다.

지난달 8일 피격으로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인 2015년 당시 역대 총리가 매년 히로시마 기념식에서 언급해 온 ‘비핵 3원칙’(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의도적으로 거론하지 않아 파문을 일으켰다.

기시다 총리는 올해 “‘비핵 3원칙’을 견지하며 엄중한 안보 환경의 현실을 핵무기 없는 세계의 이상(理想)과 연결하겠다”고 조금 결이 다른 발언을 했다. 하지만 “원폭은 수십만 명의 생명과 미래를 빼앗았다. 고통받는 분들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그의 발언에서 일본의 무모했던 전쟁 도발, 가해자로서의 반성에 관한 모습은 일절 찾을 수 없다.

이는 집권 자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우익이 전쟁 책임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88년 모토시마 히토시 당시 나가사키 시장은 “일왕이 전쟁 종결을 빨리 결정했다면 원폭 투하는 없었을 것이다. 일왕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우익 단체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패전 후 히로시마에서 처음 열린 1947년 제1차 기념식에서 하마이 신조 당시 시장 역시 “원폭 투하가 불행했던 전쟁을 끝낸 요인이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다. 우익들은 75년이 흐른 지금도 “하마이 시장이 당시 일본을 통치한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눈치를 보며 어쩔 수 없이 한 발언”이라고 깎아내린다. 전쟁 책임론에 대한 우익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일부 학자와 시민단체들이 가해자의 책임을 거론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달 히로시마대와 나가사키대가 공동 주최한 ‘전쟁의 기억’ 심포지엄에서 피폭자 3세인 하야시다 미쓰히로 나가사키대 특임연구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가해를 건드리지 않고 원폭만 언급하면 오히려 학생들이 불편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앞서 4월 히로시마에서도 ‘한국 원폭 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 모임’ 결성 50주년 집회가 열렸다. 이들은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는 법안에 한국인 등 재외국민을 예외로 둔 것을 항의하며 “피해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해자”라고 촉구해 왔다. 이들의 잇따른 소송으로 지금은 재외국민 또한 일본인과 거의 동등한 의료비 지원을 받고 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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