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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뉴 수교 6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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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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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 / 재 뉴질랜드 칼럼니스트

   
▲ 한-뉴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한뉴수교60주년’을 한글과 영문으로 서예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필자.

우리는 60주년이 내포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살아 왔다. 나이 60이 되면 환갑(還甲)이라 하여 오래 산 것을 기념하는 특별한 축하행사를 벌여왔다. 유교문화권에서 육십간지(六十干支)가 하나의 주기를 완수하고 반복되는데 그 주기가 60년이 된다. 금년은 임인년(壬寅年)인데 60년 전 1962년도 임인년 이었고 60년 후 2082년도 임인년이 되는 것이다. 금년이 한국과 뉴질랜드간의 수교 60주년이 되는 해라 그 6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60년을 설계해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조선왕조 말기인 19세기 말부터 일부 서방 국가들과는 교류가 있었으나 호주나 뉴질랜드는 한국으로부터 머나먼 남쪽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고 세계 각국의 승인을 필요로 할 때 뉴질랜드는 1949년 7월에 한국을 정식 승인해주었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UN의 결의에 따라 뉴질랜드는 미국, 영국, 호주, 프랑스, 캐나다 등 16개국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1953년5월에 한상원 씨가 뉴질랜드에 입국하여 6개월간 ‘뉴질랜드의 중앙은행 제도’를 조사, 연구하고 돌아갔으며 1950년대 중, 후반에 한국의 간호사들이 간호사 연수차 다녀갔다.

1961년 5.16 이후 당시 군사정권은 경제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던 정책에 따라 뉴질랜드와도 기술협력, 통상증진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1962년3월에 양국 간에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또한 한국인 최초의 입양아 김성미 어린이가 여섯 살 때 한복을 입고 웰링턴 공항 트랩을 내려오고 있었을 때도 이 무렵이다. 1961년 까지 수교 국가는 27개국에 불과했고 1962년 들어 중남미 15국과 이스라엘 등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이웃 호주도 뉴질랜드보다 1년 앞서 1961년에 수립된 바 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미만이었으니 2017년 이후 30,000달러 시대로 접어든 지금과 비교하면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2019년 말 현재는 UN 193 회원국 중 북한, 시리아, 쿠바를 제외한 190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뉴질랜드는 남태평양의 어업 전진 기지이다. 수교 후 한국의 원양어선이 오클랜드, 웰링턴, 타우랑아, 크라이스트처치의 외항인 리틀턴 항구에 정박하는 일이 활발해졌다. 또한 콜롬보 플랜에 의한 한국의 유학생들을 전액 뉴질랜드 정부의 장학금 지원으로 가르쳤다. 한국의 영어 교사들을 단기 연수시켰고 목축, 낙농, 원예, 임업 분야에서 한국의 두뇌들을 유치해 가르쳤다. 콜롬보 플랜이 종료되었던 1988년까지 263명의 한국 유학생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항공료, 학비는 물론 체재비, 책값, 심지어는 용돈까지 뉴질랜드 국비 부담이었다니 얼마나 큰 혜택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뉴질랜드는 한국과 정치 및 외교 분야에서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고 또한 국제무대에서 상호 긴밀히 협조하면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해 왔다. 1967년 7월에 한-뉴 무역, 경제, 기술 협력 협정이 체결되고 1968년 9월과 10월에는 당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뉴질랜드의 Holyoake 총리가 상호 교환 방문을 하였다. 1969년부터는 해마다 통상장관 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1940년대 말 이래 1970년대 초까지 최고의 경제 호황을 누렸으며 전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 국가였다. 여기에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일익을 담당했다는 아이러니도 있다. 겨울철 군수물자 보급을 위한 양모 수요의 폭등으로 인한 양모가격의 급상승으로 뉴질랜드 정부는 굳건한 경제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71년 1월부터는 외교 관계에 관한 빈(Wein)협약이 한국에 대하여도 효력을 발생함에 따라 그 해 6월에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 7월에 주뉴 한국대사관이 연이어 개설 되었다. 이어 1973년 10월에는 오클랜드에 한국무역관이 설치되었다. 1970년 초만 하더라도 한-뉴 총 무역규모는 20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2006년에 이미 25억 달러가 넘도록 규모가 커졌으며 2020년에는 29억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은 뉴질랜드의 5대 교역국이 되고 있다. 상품 교역 이외에 관광객, 유학생까지 포함하면 한국은 무시할 수 없는 뉴질랜드의 경제, 문화의 파트너이다. 대사관이 개설됨에 따라 소규모의 한인 사회이지만 구심점이 생기게 되었고 1974년 말에는 ‘뉴질랜드한인회’가 웰링턴에서 발족되었다. 1991년부터는 각 11개의 지역한인회가 발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투자이민 제도의 시행으로 인종 구분 없이 1988년부터 뉴질랜드로의 이민이 시작되어 한국인 이민자 유입이 활기를 띠었고 점수제 일반 이민 제도가 발효되자 1992년부터는 급속도로 한인사회가 확장되어갔다. 1996년 말에는 주뉴 한국대사관 오클랜드 분관이 개관되었고 1998년 10월에는 한-뉴 워킹홀리데이 비자협정 체결, 2012년에는 오클랜드에 한국교육원이 개설, 2015년에는 한-뉴 FTA가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5월28일에는 웰링턴에서 한-뉴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K-Culture Festival 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한류(韓流, Korean Wave)가 전 지구촌에 요동치고 있는 시류에 발맞추어 코비드 19 사태로 인한 문화적 갈증을 일시에 해소하려는 듯 한국의 전통과 현대적인 한류가 어우러진 종합 문화 축제였다. 한글서예 체험 공간에서는 붓글씨로 써준 한글과 영문자의 자기 이름을 받아 가기도 했고 한글로 자기 이름을 써보는 체험을 즐기기도 하였다. 한편 ‘한뉴수교60주년’을 한글과 영문으로 서예퍼포먼스를 펼쳐 보이기도 하였다. 가로글씨는 물론 세로글씨도 가능한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 붓글씨의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영문으로도 써 보임으로서 영문서예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한류의 확산이 우리말과 한글이 중심이 되어 전통문화와 어울려 상승효과를 거두기를 기대해 본다.

   
▲ 한-뉴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한뉴수교60주년’을 한글과 영문으로 서예퍼포먼스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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