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옥동 / 신한은행장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일본 근무 시절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중에서도 재일 사업가들과의 만남은 인생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주류로서 당당한 그들의 모습 뒤에는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채 쉼 없이 달려온 수많은 날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기에 스스로를 '동해인' '현해탄인'이라고 말하며 이방인으로 살았던 재일 한국인들. 경계에 놓인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한 위기감과 헝그리 정신이 맞물려 지금의 자리에 안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은행이 처한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혁신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순혈주의, 공채문화와 같은 정체성 타파도 마다하지 않는다. 금융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분야 인재들에게 문을 활짝 열게 된 것도 위기감에서 비롯된 시도다. 기회가 될 때마다 새로 들어온 이들에게 너무 빨리 적응하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무슨 엉뚱한 이야기인지 반문하는 눈빛이 느껴질 때도 있다. 쉽사리 동화되기보다 '경계인'으로서 각자가 가진 형형색색의 DNA를 곳곳에 퍼뜨려 주기 바란다고 하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행기가 양력과 중력의 치열한 공방 속에 제 길을 나아갈 수 있듯이, 조직 밖에서 잡아당기는 힘과 안에서 붙잡는 힘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삶이 아닐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불안과 끊임없이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두 어깨를 짓누를지라도 기꺼이 경계에 설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성장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회사로서도 현실에 안주하며 머무르려는 직원보다 언젠가 아쉬운 작별을 할지언정 낯선 시선으로 변화의 자극제가 되는 인재가 절실하다.

최진석 교수는 저서 '경계에 흐르다'를 통해 "경계에 서 있으면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미래로 몸이 기운다"고 말했다. 경계에 있을 때만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으며 경계에 서지 않는 한, 한쪽의 수호자일 뿐이라는 의견에 200% 공감한다. 경계에 설 용기는 이국땅에서의 성공이나 새로 들어간 조직을 변화시키는 일처럼 특별한 상황에서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여행도 경계를 넘나들며 익숙함 대신 낯섦을 택함으로써 경험의 지평을 넓히는 행위라 하지 않던가.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라는 말이 있듯이 다르게 생각하는 일에는 에너지가 많이 들어 누구나 피하고 싶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추락하지 않고 희망찬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다양성을 너끈히 품어줄 수 있는 사회의 포용력이 선행 조건이다. 스스로 경계인의 삶을 택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모두 함께 그려갈 다채롭고 활기 넘치는 사회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