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 / 실리콘밸리 특파원

지난 19일 오후 5시(미 서부 기준). 테슬라가 전 세계 생방송으로 ‘AI(인공지능) 데이’를 시작하겠다고 밝힌 시각이지만 행사는 지체됐다.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별도의 공지는 없었다. 행사가 생중계되는 유튜브 앞에서 4만명 가까운 시청자가 일론 머스크의 등장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5시 47분이 돼서야 머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늦어서 미안하다”면서 “테슬라는 자동차 회사를 넘어선 AI 딥러닝 회사”라고 운을 뗐다.

이날 테슬라가 발표한 내용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AI 관련 내용으로 가득 찼다. 형식도 투박했다. 삼성전자나 구글⋅애플 등이 신제품·신기술을 발표할 때 나오던 화려한 그래픽과 흥겨운 배경음악도 없었다. 사내 세미나나 AI 학회 같다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한창 설명이 진행될 때 시청자는 4만7000명까지 치솟았다. 전 세계 AI 엔지니어는 전부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만명 가까이가 47분을 기다려 이토록 재미없는 발표 내용을 1시간 반 동안 지켜본 이유는 뭘까. 테슬라, 그리고 일론 머스크가 ‘앞으로의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물음에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테슬라는 행사 막판에 인간형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내년에 시제품을 내놓겠다고 했다. 일부 외신은 “속지 말아라. 일론 머스크가 이야기한 것 중 제대로 지켜진 것은 거의 없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하지만 “비트코인으로 이미지가 추락한 머스크가 이번 발표로 자신이 테크 개척자임을 다시 증명했다”는 반응도 많다.

한국인 엔지니어 중엔 “머스크에게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모습을 봤다”는 사람도 있다. 불굴의 의지와 뛰어난 기술력으로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어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날 머스크가 보여준 것은 “당신 이거 해봤어? 우린 할 수 있어”라며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이다.

머스크의 발표를 보며 한국의 기업들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대기업들은 빛나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다.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과 LG 등은 중국의 추격에 맥을 못 추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이 제시하는 비전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것들뿐이다. 과감히 도전하고 쟁취하는 기업가 정신은 스타트업에서 찾기가 더 쉽다.

머스크는 이날 행사의 마지막을 AI 인재 채용 홍보로 마무리했다. “우리의 비전이 이 정도다. 뜻 있는 AI 엔지니어들은 테슬라로 모이라”는 것이다. 세계적 천재가 모이는 실리콘밸리의 테슬라와 한국의 대기업을 직접 비교하는 것이 무리인가.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들도 세상을 뒤집는 비전을 선포하고, 인재를 모으고, 시행착오를 거쳐 성과를 이룬 경험이 있다. 세상은 그런 기업가 정신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