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상균 / 서울대학교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장

두려워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세계사적·전략적 변곡점 직면
이를 넘어 한 단계 도약하려면
분절된 사일로 타파할 비전과
스케일 가진 국가지도자 절실

변화는 누구에게나 두렵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는 더욱 그렇다. 글로벌 팬데믹과 빨라진 디지털 대전환,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으로 글로벌 시장이 재편되고 새로운 질서의 국제사회가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두려워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사적 전략적 변곡점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겪는 최대 규모의 변화에 기업과 대학, 국가에 어려운 의사결정을 과감하게 내리는 리더가 절실하다.

전략적 변곡점은 과거의 룰이 더는 통용되지 않는 큰 변화가 일어난 시점을 말한다. 1980년대 중반 일본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도전으로 반도체 산업의 전략적 변곡점을 맞은 인텔 CEO 앤디 그로브는 PC 시장의 성장 잠재력을 보고 인텔을 CPU 반도체 기업으로 전환했다. 주력 사업이던 메모리 반도체를 과감하게 버린 것이다. 살을 깎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인텔은 향후 20여 년간 CPU 분야에서 독보적 위상을 유지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로브가 연 PC 시대의 인텔 전략은 이제 모바일과 클라우드 시장을 장악한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기업에 가려 더는 유효하지 않다. 가성비가 좋은 인텔 호환 CPU를 만드는 팹리스 기업 AMD가 인텔을 위협하고 있다. 또 다른 팹리스 GPU 기업 NVIDIA의 시장 가치가 인텔의 두 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TSMC가 팹리스 반도체 기업의 제조 플랫폼 회사로 앞서가는 현 상황에서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자체 반도체 팹을 보유한 인텔은 전략적 의사결정 없이 몇 년을 지냈다. 올해 초 새로운 CEO를 맞은 인텔이 성공적으로 변신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2005년 말 필자의 실험실 벤처는 글로벌 SW 기업 SAP의 전략적 변곡점에서 마지막 혁신 실험을 위해 인수됐다. SW 기업 중 반세기의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이 기업은 1992년 출시한 R3 미들웨어 기반 ERP로 글로벌 시장을 제패했다. SW 판매 금액의 22%를 매년 유지보수 비용으로 받는 안정적 구조는 내부 혁신에 독이 됐다. 드디어 협력사 오라클이 SAP 사업 영역을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SAP는 외부의 피를 수혈하기 위해 이스라엘 창업 국가의 아이콘 '샤이 아가시'의 회사를 인수하고 그를 CEO 후보로 임명했다. 파괴적 혁신의 씨앗이 필요했던 아가시는 필자의 실험실 벤처를 인수하고 경쟁사들의 기술을 뛰어넘을 미지의 플랫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실험 프로젝트는 관성에 빠져 있던 SAP의 내부 저항에 부딪쳤다. 아가시가 SAP를 떠난 후 축소된 지원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팀은 실험 연구를 계속해 SAP의 주력 플랫폼이 된 HANA의 모습을 시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이후 SAP 창업자 하소 플래트너 회장이 앞장서 내부 기술자들을 설득했다.

10여 명의 수혈된 피로 시작한 HANA 프로젝트는 한때 2000명까지 불어났고 SAP는 혁신 기업으로 새로 태어났다. 오늘날 삼성전자를 비롯한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이 플랫폼을 활용해 실시간 글로벌 기업 경영을 한다. 이 마지막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면 SAP는 다른 기업에 매각되었을지도 모른다.

전략적 변곡점에서 정해진 성공의 답은 없다. 오로지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과감한 실험만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일시적 실패는 필수적이다. 비전과 확신, 소통을 통해 이 실패를 경영해 성공을 이끄는 것은 결국 리더의 몫이다.

세계사적 변곡점에서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과 정부, 대학이 과거의 룰에 따라 분절된 사일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해 당사자의 좁은 시각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사일로 체계에서 판을 바꿀 파괴적 혁신이 자랄 수 없다. 한국이 이 전략적 변곡점에서 한 단계 도약하려면 이 사일로 현상을 타파할 비전과 스케일을 가진 국가 지도자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