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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새로운 사료 옥중서간의 행방은?한일병합 100년에 기억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생각하며…
이수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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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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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옥중서간에 담겨있을 동양평화사상과 저격의도의 내용 / 감정에 치우쳐 허공 치는 소리보다 증거 사료 분석을 통한 논리적 주장과 설득력으로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연구자 육성과 국가적 연구 조성 시급

   
▲ 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감정 표출만으로 풀기 힘든 한일역사청산, 냉철한 연구와 분석 자료를 얻기 위한 노력


해외 교포의 삶이란 다양한 문화와 좌충우돌하며 살아가야 하기에 힘들고 벅찬 생활이 된다는 것은 굳이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나마 편하게 보이는 직업이 대학 교수나 연구자들이라 하겠는데, 알고 보면 해외의 대학에서 교수를 한다는 것은 어느새 외교관 역할까지 해야 하니 참으로 중책이라 할 수 있다.

교원양성대학에서 다문화 사회를 연구하며 교사양성과 연구지도로 잠을 설치기 일쑤다. 사서 고생한다고들 하지만 한일 관계사론을 맡고 있어서인지 독도 문제, 종군 위안부 문제, 강제연행 노동자 문제는 물론 한일 역사문제를 다루다보면 동아시아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몇 개국 관련 자료를 뒤져야 하기에 그야말로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전사 같은 생활이다. 게다가 재일교포 문제와 최근의 뉴커머 문제 등, 한일관계에 있어서는 정부 현안까지 고심해야 한다.

일본은 어떤 말보다도 합리적 이론을 뒷받침하는 자료증빙과 철저한 답사와 증언, 수준 높은 연구 자료를 제시해야만 납득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반대로 논리적 전개와 자료만 있으면 대화하기는 편한 부분도 있다. 그렇기에 감정적 용어를 배제하고, 냉철하게 자료 분석을 하여 결과를 담담히 내밀면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감정이 우선되어 가슴이 미어지고 억울한 면이 있어도 일제 강점기의 역사 청산을 위해서는 힘든 작업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제자 양성과 연구로 바쁜 와중에도 한국과 일본 수많은 곳을 다니다보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어느 정도 머릿속에 들어있다. 그런 필자에게 최근, 어릴 적의 보물찾기 보다 더 힘든, 그래서 집착이 더해가는 수수께끼의 자료가 어느 땅에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안중근 옥중서신의 역사적 가치와 수집을 위하여

   
▲ 클라르테 운동 기관지 창간호.파리의 개인 박물관 소장
필자는 지난 15년간 국제 지식인 문화운동인 클라르테 운동과 관련해서 연구를 해 오고 있다. 제1차 대전 당시 41세의 프랑스 작가 앙리 바르뷔스는 최전방으로 자진해서 참전하여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며,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임을 강조한다. 그리고『클라르테(빛, 광명, 깨달음, 자각)』란 책과 더불어 피카소나 아인슈타인, 러셀, 마티스 등이 참가한 클라르테 문화운동을 결성하였고, 그의 지식인의 실천적 행동은 한국과 일본의 초기 문학사상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일본인중 클라르테 운동에 관련되었다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 고마키 오우미였다. 연구과제의 대상이었던 고마키 오우미의 유족들과 만나면서 필자는 친분을 쌓으면서 안중근과 관련된 중요한 사료를 전해 듣게 되었다.

고마키 오우미 자제분들이 필자에게 “예전에 우리 집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서 아버지한테 적어서 보낸 편지가 있었고, 아버지도 그를 존경하여 그가 사형된 날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낸 적이 있어요. 그 편지는 어느 신문사에서 빌려달라고 해서 가져갔는데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답니다”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해 주시는 것이었다.

“어느 신문사의 누가 가지고 갔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회피하는 바람에 더 이상 연세 드신 노인에게 집요하게 묻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사실 후회를 하고 있다. “안중근이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동양평화론을 일본의 젊은 국회의원에게 어떻게 부탁을 했으며, 누가 안중근에게 고마키 오우미의 아버지를 소개했을까? 어느 신문사(일본 신문사 이었을 가능성)의 누가 그것을 알고 가져가서, 그 뒤, 공개조차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커갈수록 그 때 묻지 못한 것이 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이와 관련한 사실들은 연구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기에 일본사회나 국내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옥중서신이 나온다면 당시의 감옥에서의 그의 심경은 물론이고, 그가 생전에 일본인 국회의원에게 토로했던 사상도 좀 더 다양한 형태로 엿볼 수 있기 때문에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대한 그의 취지도 보다 명확히 할 수 있는 1급 자료가 되는 것이다.

안중근이 감옥에서 편지를 보낸 고마키 오우미의 아버지인 오우미야 에이지는 1874년에 7남 5녀의 아홉 번째 아이로 일본의 아키타 현(드라마 아이리스의 촬영지)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부잣집이던 오우미야 집안의 양자로 들어갔고, 그 뒤, 현의원, 대의사(현, 국회의원) 등을 하면서 전기, 석유, 광산 사업 개발과 현지 신용조합, 아키타 은행 등을 창립하는 등, 정치 경제적 면에서 지방의 명사였다. 1904년에 만 30세로 최연소 대의사로 당선된 그는 1908년의 제10회 총선거에서도 당선되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전도양양한 정치가로 활동을 하였다. 그런 그를 누군가에게서 듣고 일본의 미래라고 생각하여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부탁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 고마키 오우미의 자서전, 안중근 서간 설명부분
그의 아들로 파리 유학 후, 일본에서 『씨 뿌리는 사람』 발행과 더불어 국제주의 문학운동을 전개하고, 호세이 대학교 교수를 했던 고마키 오우미의 자서전에는 안중근 관련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조선인 안중근의 옥중에서 보낸 글이 어떤 경로로 우리 집에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그(안중근)는 조선의 국사(국가의 영웅)라고 안중근을 지사(志士, 우국지사) 로서 평가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버지는 자유주의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쿠류카이(黑龍會); 초우익 보수단체」의 우치다 료헤이 등과 친교가 있었던 면이 있는 모순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안중근은 사형이 되기 전, 사람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해 왔고, 우리 식구들은 그가 처형된 날, 불단(집에서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불교식 제단) 앞에 향을 올리며 명복을 빌었습니다.”(小牧近江『ある現代史(어느 현대사)』1965년,16쪽)

그리고 고인이 된 고마키씨 장녀 기리야마씨도 그 편지를 보았고, 안중근의 제삿날이 오면 할아버지는 안중근을 기리며 향을 피웠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그렇기에 안중근이 보낸 글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사료의 가치로 보아 일본의 어느 신문사의 고위간부가 갖고 갔을(혹은 유족들이 어떤 연유로 양보 했을) 가능성도 높다.

무슨 연유에서 아직도 공표되고 있지 않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고, 혹시 한일병합 100년이란 하나의 역사 청산의 주요시기에 발표가 되어주지 않나 하는 기대도 없지 않다. 사라진 안중근 살해 순간의 동영상 필름과 더불어 이 편지는 중요한 근대사 자료이기에 세상의 빛을 보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또 하나는 필자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연구하면서 당시 일본의 왕족, 정치가, 일반서민들의 사진들을 명성황후 살해지시를 한 주요 인물들의 고향이나 관련 도서관과 자료관에서 많이 볼 수 있었기에, 왕궁습격을 감행한 암살자에게 내 보인 명성황후 사진이 남아있지 않음은 다소 의아스럽긴 해도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한일 공동번영과 올바른 한일역사청산을 위한 한일 연구자들의 협력 기대

   
▲ 점점 기세를 더해가는 일본 우익단체 (야스쿠니 신사)
2009년 12월 4일에 교토 조선 초급학교에 ‘재특회’라는 우익들 단체가 습격을 하여 초등학교 아이들이 공포 속에 두려워하며 학교 가기를 꺼려한다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그리고 해마다 회자되는 독도 문제,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군국주의의 희생자가 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당시 대가가 99엔이란 판결로 또다시 지친 삶을 우롱하는 비인권적 태도를 자행하고 있는 일본의 전후 역사인식을 볼 때, 아직도 불행한 역사를 넘어서기에는 참으로 많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제대로 찾아서 퍼즐처럼 꿰맞춰 놓아야 균형 잡힌 역사청산이 가능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버거운 면이 있다. 정부의 지원과 학자들의 협력이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2010년 8월이 오면 100년 전의 아픔으로 더더욱 가슴이 저밀겠지만, 차분하게 1차 자료 수집에 노력하고 있다. 이제 개인적 연구 수준을 넘어서 한일 양국의 관련 연구자들이 양국의 공동번영과 올바른 한일역사청산을 위해 자료의 공동 분석, 공동 연구 등을 통하여 과거의 우행이 뿌려놓은 아픔의 흔적들을 하나씩 치유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하길 바라는 것이다. 과거이기에 냉철해 질 수 있고, 과거의 역사이기에 향후 그런 불행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지혜의 의식을 공유하며, 미래지향적 손잡기를 해야 한다. 잘못된 민족주의, 편협한 국수주의로는 결코 역사청산은 불가능해진다. 한국인, 조선인 다 쫓아내겠다고 외치는 일본 우익과 동질이 된다면 너무 초라한 사회가 되는 게 아닐까? 글로벌사회, 국경이 없는 인구의 대이동을 목도하며 사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되레 고립을 자초하는 길이기에 우리는 앞을 나아가기 위한 과거 청산과 현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귀중한 자료와 비밀로 감춰진 문서들이 공개되거나 기부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활용하는 장이 열리길 바란다. 개인적으로는 속히 안중근 옥중서간이 공개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아직도 서로 확인해야 할 과제가 많은 한일 관계이다. 신중하면서도 배려하는 정치 외교적 대응은 물론, 기업가들의 사회적 역할의 인식, 풀뿌리 시민단체의 절도 있는 연대의식, 그리고, 청소년 교류를 통한 다문화 이해교육과 자기 문화 알기, 연구자들의 성실하고 정직한 연구 자세를 통해 얻어진 내용들을 미래를 위한 연구 자료로 삼고, 내일을 향하는 이정표를 만드는데 다양한 협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해외 교포 연구자들의 연대도 돈독히 해야 한다. 그런 성숙된 모습으로 동북아시아의 규범을 만들어야만 ‘아시아 공동체’라는 말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각국의 수장은 물론 시민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는 내일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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