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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여성의 삶과 발전
정음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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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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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향 / 장강사범학원

올해 설을 열 며칠 앞두고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시던 시숙모님께서 돌아가셨다. 어릴 적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남편에게 더없이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주셨던 시삼촌과 시숙모님이셨다. 우리가 결혼을 할 때에도, 아이가 금방 태어났을 때도 많은 도움과 사랑을 주셨던 고마운 숙모님이셨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숙모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도 배웅해드리지 못했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저 받기만 하고 하나도 보답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한지… 3.8 부녀절을 맞으며 숙모님을 추모하며 숙모님과 주변 분들의 삶에 비춰 조선족여성의 삶과 발전을 돌이켜보고자 한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왔다 간다는 것은 무엇이든 남기고 가는 일일 것이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아무런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여성들의 삶은 보통 공적 영역의 진출이 두드러지지 않아서인지 가족 내에서, 사적 영역에서 많이 알려질 뿐 공적으로는 크게 회자되지 않는다. 신강 투르판(당나라 때 이곳에는 한족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에서 발견된 당나라 때 여성의 묘지명을 보면 30줄 되는 장문의 묘지명에서 진정 묘의 주인인 여성에 관한 기록은 단 교자다방(敎子多方)이라는 네 글자밖에 안 된다고 한다. 모두 남편과 아들들에 관한 기록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발견된 97개의 기혼녀성의 묘지명에는 남편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게 없지만, 기혼남성의 묘지명에는 아내에 관한 기록이 아주 적다고 한다. 194개 기혼남성의 묘지명중에 단 5개만 아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도 처가가 대단한 집안인 경우에만 약간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여성은 역사에서 두드러진 존재가 못되었다.

나 역시 숙모님에 대해 쓰고자 했지만 전업주부로 가족만을 위해 살아오신 숙모님이기에 실은 숙모님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숙모님은 1955년 길림성 영길현의 모 조선족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하셨다. 숙모님은 삼촌과 결혼을 하여 농촌의 맨발의사였던 남편을 의학대학에 보내고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 대학공부 뒷바라지를 하셨다고 한다. 슬하에 딸 둘을 낳아 키우며 아무쪼록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정말 애쓰셨다. 내가 남편과 결혼하던 그 해 큰 딸이 고중을 다니고 작은딸이 초중을 다니고 있었는데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며 당신의 딸들도 나중에 박사공부까지 하고 늦게 결혼하기를 바라셨다. 숙모님 바람대로 딸들도 훌륭히 잘 성장하여 박사공부를 끝내고 상해와 장춘의 모 대학에서 모두들 어엿한 교수로 일하고 있다.

숙모님은 친정 형제들이 개혁개방 이후 산동 위해로 진출해 위해에 자리를 잡자 딸 둘을 대학에 보낸 후 영길현에서 위해로 이사 가셨다. 그래서 위해에서 돌아가셨는데 이번 코로나로 료녕, 광동, 중경 그리고 한국 등 해외에 산지사방 흩어져 살고 있는 친척들은 그 마지막 길을 배웅해드리지 못했다. 아무리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참 마음이 많이 서글펐다.

숙모님의 친척들처럼 많은 이들이 도시화와 지구화의 붐을 타 나서 자란 농촌과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다. 좋은 일이다. 어디에 갇혀있지 않고 도전정신과 생활력을 키우며 억척스레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컴퓨터와 스마트폰, 인터넷 통신기술의 발전이 갈라져 살아가고 있는 친척, 가족들이 서로 얼굴을 보며 통화도 할 수 있고 정을 나눌 수 있게 해줘 참 좋다. 하지만 가까이서 서로 손도 잡아보고 포옹도 해보고, 등도 다독여주는 스킨십이 전혀 없이 멀리서 보내는 위로는 분명 한계와 제한이 따르기 마련이다. 부모님 연세가 높아지며 시력도, 청력도 다 예전보다 못해지고 그렇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코로나로 국내 이동이 어려워지고 국경이 거의 닫힌 비상시기는 더욱 그렇다.

몇 년 전에 조선족여성들의 출산과 자녀양육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청도에 살고 있는 조선족여성들을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흑룡강, 료녕성, 길림성 출신의 젊은 여성들이였는데 고급중학교나 대학을 금방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한국기업이 많은 청도로 이주하여 한국기업에서 일하다 거기서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인생의 큰 난관과 마주하게 됐다. 그런데 출산할 적에 혹자는 부모님이 고향에 계셔서, 혹자는 부모님이 한국에 가 일하고 계셔서 출산시 친정어머님의 보살핌과 도움을 못 받고 힘겹고 고독하게 출산과 육아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아들, 아들하며 키워 아무런 가사일도 할 줄 모르고, 할 생각도 없는 남편 때문에 출산한 후 짜기만 한 바깥 식당 음식을 먹거나 혼자서 국수(面条)를 끓여먹어야 했던 설음이 있었다. 옆 침대 한족여성이 출산한 후 그녀의 집식구들이 비둘기탕이요, 붕어탕이요 영양가 높은 음식을 해오고, 많은 가족과 친척들이 보러 오는 것을 지켜보며 부러움과 서러움을 참아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하며 겪어야 했던 수많은 어려움들,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직장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사례도 몇 있었다. 그중 어떤 여성은 아이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모로 신경을 쓰고 자신도 주말우리말학교에서 조선족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도시화와 지구화로 동북 고향에 남아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은 전체 조선족 인구의 1/3밖에 안된다고 한다. 산해관 이남 지역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조선족, 한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 각기 조선족 총인구의 1/3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중에 개혁개방 초기 한국에 나가 식당일, 간병인, 가사도우미, 심지어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며 목욕관리사로 일하며 힘들게 번 돈을 고향에 보낸 조선족여성들이 있다. 그 돈으로 자녀들을 대학, 대학원까지 보내고 결혼 때 아파트까지 사준 억척스러운 여성들, 그리고 언어도 안 통하는 러시아에 보따리장사를 떠난 여성들, 개혁개방 초기 장마당에서 남성들은 체면 깎인다며 기피하던 장사를 하던 여성들도 있다. 그런 조선족여성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조선족의 발전이 있지 않을까?

요새 조선족 언론의 보도를 보면 북경이나 상해, 천진, 청도, 연태 등지의 주말우리말학교에서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 조선족여성들이다. 애심여성네트워크, 각지의 여성협회를 비롯한 조선족여성단체들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조선족 대학생, 양로원에서 노후를 보내고 계시는 조선족 어르신들을 비롯한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며 노력하고 있는 여성들, 스스로 평생 학습을 견지하기 위해 독서회 등 모임을 만들고 적극 참여하며 꾸준히 공부하는 여성들의 모습 역시 참 보기 좋고 존경스럽다.

동북이나 산해관 이남, 해외의 어디서 살든 우리의 삶은 녹록치 않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친 이들도 있고, 비혼으로 싱글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모든 개개인은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며 미래를 설계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남성이나 여성 모두 삶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메고 가야 한다. 하지만 분명 여성이 진 출산과 육아라는 짐은 가볍지 않다. 시숙모님처럼 현모양처로 헌신적인 삶을 살며 남편의 사업과 자녀들의 학업, 직장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준 여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숙모님께서 당신의 딸들은 당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많은 여성들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갇히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도 직장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남성들도 육아와 가사 일을 많이 분담하며 더욱 바람직한 성별평등문화를 발전시켜나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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